책장을 펼치자마자 시작되는 예민하고 지적인 중산층 백인 여성들의 호들갑에 짜증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특히 그 문제가 반드시 설득해야만 하는 종류의 것이라면 우리는 상대를 설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비록 말 섞기 실은 신경과민의 뉴요커들이라도! 상대가 나와 명백히 다른 태도와 입장을 보이는 경우 내 스스로에게 가장 납득가는 설명이 상대에게는 최선의 설명이 아닐 수 있다.
평생 내시경검사를 한번도 받아본적이 없다는 50대 남성을 설득하려고 해본 적이 있다. 직업이 임상병리사이고 의료와 관련된 직장에 근무하는 분이었는데 매년 직장건강검진을 받으면서도 내시경 시술과 수면마취, 혹시 발견될지 모를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시경 검사는 받지 않는다고 해서 내심 놀랐다. 알고있는 의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대한민국 50대 남성에게 정기적인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이 왜 중요한지를 한참 설명했지만 결국 내시경 검사를 하도록 설득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다시 만나 안부를 물으니 그사이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을 받았다고 한다. 정작 그 사람이 마음을 바꿔 내시경을 하게 만든건, 수면내시경을 받으며 한숨 푹 잤더니 매우 개운하더라는 부하직원의 코멘트였다.
이런 사례는 주변에서 자주 접한다.
삼십년가까이 간호사로 일하던 분이 허리디스크가 심해지자 유명한 한의원에서 비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아로마침을 맞고 한약을 먹는다고 했다. 여전히 통증이 많이 심해 잘 못 걷지만 인공적인 약이나 병원시술은 몸에 더 나쁠 것 같아서 한방치료를 꾸준히 받고싶어 했다. 얼마뒤에 안부를 물으니 최근 약을 잘 쓰기로 소문난 약국을 찾아가 약을 처방받아 먹기 시작했더니 한결 편안하다고 했다. 한의원과 약국 모두 효과를 봤다는 주변 사람 소개로 찾아간 곳이다.
내시경을 안하거나 한약을 먹는게 나쁘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본인의 건강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에 통계나 논리적인 근거에 따라 판단하기보다는 주변의 사례와 관심가는 이야기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이다. 의학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문제에서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도!
자, 그렇다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팩트와 논리와 통계가 먹히지않는 상대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설명하고 설득해서 행동을 바꾸도록 해야한다면 우리는 어떤 방법을 써야할까? 더 많은 팩트를 기반으로 한 더 논리적인 설명을 고수하며 지적인 자존감을 지킬 것인가, 상대의 관심사를 파악하여 공감하고 회유하며 설득할 것인가.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를 읽는 내내 이같은 생각들이 머리에 맴돌았다. 이 책은 저자가 본문에 사용한 표현 그대로 "나와 같은 계급의 어머니"들과 저자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쓴 책이다.
면역에 관하여는 면역에 관하여 이야기하는듯 하지만 사실 면역에 관한 루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면역계와 백신의 작용에 대해 학문적으로 궁금한 학생을 위한 책이 아니다. 백신부작용이 걱정되서 아이에게 백신접종을 거부하는 중산층 엄마들, 정부와 제약회사의 설명을 못 믿겠는 예민한 지식인 엄마들이 읽어야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빌 게이츠가 극찬을 했다고 한다. 공공보건 향상을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하는 빌 게이츠가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찬을 한 것인지 다소 짐작되기도 하지만 일면 궁금하기도 하다.
어쨋든 갸름한 턱을 살짝 치켜올리고 소아과 의사의 설명에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는, 지적인 엄마들에게 권하면 좋을 책. 이 책 쓴 작가도 한까칠하는 뉴요커 지식인 엄마거든, 근데 어쩌고저쩌고한 이유로 아이가 백신접종을 하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거든?! 이라는 눈빛을 보내며. 우리나라는 보험적용이 안되는 비싼 예방접종들까지 추가로 접종하는 열혈엄마들이 더 많은 듯도 하지만.
- 코로나가 창궐하는 2020년도에 예전에 적은 글을 다시 읽어보니 다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같다. 여전히 코로나를 조심해야 하는 시기에 독감까지 걸리면 안 될 것 같아 열심히 독감 예방접종을 맞고 맞추었는데, 며칠새 약이 부족해 접종을 못 받는 사람도 생기고 독감 예방접종 후 갑자기 사망한 사람들 소식에 독감 예방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특수한 상황이라 무엇이 맞고 틀린지 이야기하기 쉽지않지만, 이럴 때일수록 원칙은 지키고 통계와 논리도 따져보며 차분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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