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작가의 책은 재밌다. 500쪽이 넘는 [완전한 행복]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할 일들이 미뤄지는 불안감이 책의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는 못했다. 다 읽은 뒤엔 책의 모티브가 되었을 실제 사건에 대한 기사를 찾아 읽었다. 이번에도 불쾌한 마음이 궁금한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어수선한 꿈들을 꾸느라 잠을 설쳤다.
정유정 작가의 전작들
[7년의 밤]을 읽은 뒤 오랫동안 밤의 도로와 팬티바람으로 쫓겨나는 여자아이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캄보디아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읽었던 [28]의 재난 상황은 후덥지근한 공감각적 체험으로 기억에 남았다. [종의 기원]을 읽은 뒤에는 길에서 혼자인 젊은 남자를 만날 때마다 경계하고는 했다. 정유정 작가의 책은 어떤 식으로든 모두 인상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게 재미있었다. 이번 책 이번 책 [완전한 행복]도 마찬가지.
오리 먹이와 해피밀
이번 책은 아마도 오리 먹이와 해피밀 세트로 먼저 기억날 듯 하다. 책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정유정 작가의 신작이라는 것만 알고 읽기 시작했으므로 도입부에서 오리 먹이를 만드는 과정을 무심히 읽어 내려갔다. 아이방과 인형이 등장하는 장면 이후에야 이 이야기가 무슨 소재를 다루고 있는 건지 짐작한 나는, 비로소 오리 먹이 만드는 과정을 복기하며 신물을 삼켰다. 맙소사, 정유정 작가 너무 용감해. 왠지 마음이 동요된 나는 책을 읽다 말고 소설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에 대한 기사를 잔뜩 찾아 읽었다. "이상하고" "불쾌"해서 기억에 남았으나 전혀 해석하지 못한 사건을 정유정 작가는 어떻게 풀어나갈까 궁금한 마음으로 책의 나머지를 읽기 시작했는데...
사이코패스의 내면
역시 이 작가는 주인공의 내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구나. '악의 3부작'이라 불리는 책을 쓰는 동안 가족들이 작가를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했다는 인터뷰가 생각났다.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써가며 골똘히 들여다보았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완전한 행복]은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의 내면을 들려주지 않는다. 주인공의 언니와 남편, 딸의 목소리를 통해, 세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주인공의 형태를 만들어 나간다. 싸이코패스의 목소리를 들려줘 인상적이었던 [종의 기원]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법인데, 주인공을 해석하지 못하는 세 사람을 통해 필터링된 주인공의 말과 행동이 전해주는 분위기 또한 싸하기는 마찬가지.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본문 중 인용)
주인공이 무서운 건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타인의 존재보다 우선시하는 것, 자기애에 가득차 타인의 삶과 생명 자체를 망가뜨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 때문이다. 끝까지 몰아붙이는 가스라이팅이라고나 할까, 복종하거나 제거되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으며, 평범한 영혼은 망가져간다.
나 자신으로 살아남기
세 명의 주변인 중 감정이입한 캐릭터는 주인공의 언니이다. 남편과 딸이 주인공의 가스라이팅의 대상이라면, 언니는 주인공의 연기와 가스라이팅을 통해 가족으로부터 배제되는 인물이다. 언니에게 몰입하여 응원한 이유는 독립적이며 책임감 강한 캐릭터를 좋아하는 한결같은 취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 혈연과의 관계 변화에서 오는 감정적 소모가 많은 개인사 때문이기도 했다. 자기애가 강하고 가스라이팅을 주도하며 필요에 따라 여론을 형성하기를 서슴지 않는 가족 1, 의존적이며 유아적이고 책임감 없는 가족 2, 가족 내에서 가장 권력을 가진 존재이나 갈등이 싫어 피해자를 돕지 않고 회피하는 가족 3... 등으로 구성된 가족은 복잡하게 얽혀있기 마련이다. 가족 1의 이상함을 직시하고, 가족 2의 죄책감에 동조하지 않고, 가족 3이 모른척하기 힘들게 분란을 일으키는 가족 4는 대개 가족 1,2,3의 비난을 받게 된다. 밖에서 보기에는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가족을 등진" 존재가 돼버린다. 그러나 가족 4가 꽤 똑똑하고 독립적이라 해도 태어나서 자란 혈육 내에서 '부당하게' 비난받으며 내쳐지는 단계를 통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도 결국은 가족과 분리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나는 이해했다.
이런 이야기
[완전한 행복]은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해할 수 없는 싸이코패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가스라이팅으로 피폐해지는 피해자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삶을 찾는 사람의 어려움을 들여다보고 응원할 수 있다. 되는대로 사용하는 '행복'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재밌다.
이런 분들께 추천
- 정교한 스토리와 서스펜스가 주는 재미를 느끼고 싶은 분들
- 정유정 작가의 전작이 재밌었던 분들
- 싸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책이나 영화, 미드를 즐겨 보는 분들
- 그것이 알고싶다를 즐겨 보는 분들
- 가스라이팅과 가정폭력 속에서도 독립적인 인생을 찾는 주인공을 응원하는 분들
- 더운 여름 밤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재밌는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풍의 언덕 (0) | 2021.01.06 |
---|---|
우리 둘뿐이다 - 책 읽던 초등학생의 마음으로 (0) | 2020.10.22 |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 내 인생의 책 다시 읽기 (0) | 2020.10.21 |
그리스인 조르바 (0) | 2020.10.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