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고 있는데 숨이 찰 때가 있다. [폭풍의 언덕]의 휘몰아치는 감정에서 거리를 두고 한숨 돌리기 위해 읽기를 잠시 중단해야만 했다.
이렇게 강렬했던가.
세계명작도서 같은 것들을 중고등학생 시절 읽어치웠던 터라, 대부분의 문학 작품은 제목과 '읽었다는 기억'과 간단한 줄거리 정도만 기억에 남아 있다.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읽었던 것 같은데 독일 청년의 슬픔과 프랑스의 동백꽃 사랑과 러시아의 절망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으므로 세계명작은 아련하고 이상한 느낌으로만 남았다. 이제 중년에 접어들어 자잘한 경험을 뒤로하고 다시 읽은 책들은 깊고 풍성하다. [폭풍의 언덕]도 거친 남자 히스클리프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었는데, [본격소설]을 재밌게 읽었던 후로 원작을 꼭 다시 읽어보고 싶어 결국 꺼내 들게 되었다.
[폭풍의 언덕]은 강렬한 감정묘사와 휘몰아치는 전개가 정말이지 대단하다. 런던 여행 중 방문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브론테 자매의 기념비를 보며 기분이 묘했었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요크셔의 황량한 저택에서 자란 이십 대 여성이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어쩌면 예민한 감수성의 이십 대 여성이었기에 이런 사랑 이야기를 상상해 낼 수 있었던 걸까. [본격소설]의 사랑이야기가 섬세하고 절절하다면 원작은 거칠고 단도직입적이다. (본격소설은 폭풍의 언덕을 전후 일본을 배경으로 각색한 소설이다.) 옵저버에서 선정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소설"이라는 문구를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호불호가 갈릴 소설일 것이다. 열렬한 추종자와 재미없어 끝까지 못 읽겠단 사람으로.
그래 봤자 사랑이야기 아니야?라고 내 옆의 모군은 말하겠지. 사랑이야기가 맞으니깐. 어려서 만난 소년소녀의 사랑이야기이자, 그 사랑에 얽힌 두 집안의 이대에 걸친 비극 이야기는 한국 아침 드라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치정 스토리와도 닮아있다. 이 책의 매력은 서로 얽혀 드는 스토리보다는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사랑의 감정에 있다. 말 그대로 사랑하다 미치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 소설의 주인공들과는 다르다. 사랑을 곁눈질하지 않는다. 사랑에 몸을 던진다. 정말 사랑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압도적인 사랑의 감정에 지배당한다. 그래서 놀랍다. 1847년에 발표됐으니 사람들이 플롯이 엉성하고 감정 묘사가 거칠다고 욕했을 만도 하다. 실제로 플롯은 엉성하고 사람들은 쉽게 죽고 감정이 격하니까. 서사는 부족하고 감정의 묘사에 집중하는 것. 그런데 그게 이 소설의 매력인걸.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 떠올릴 때면 캐서린의 말이 생각날 것 같다.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오면 나무들이 변해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 사랑도 변해 갈 것을 나는 잘 알아. 그렇지만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은 나무 아래에 놓여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서, 눈에 보이는 기쁨의 원천은 아니지만 꼭 있어야 하는 거야."
....
"그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에게 반드시 기쁨이 아닌 것처럼) 내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기쁨이 아니지만 언제나 존재하는 사랑.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는 마음이 항상 기쁨이 아니란 걸 깨닫는 날이 온다는 걸 처음 폭풍의 언덕을 읽던 열서너살의 나는 몰랐더랬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임을 알게 된 중년의 나는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랑을 걷어 내고 효율적이고 안전한 인생을 산다면, 우아한 집과 깔끔한 통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마음이 얼마나 황량할까, 아니면 미련 없이 단정할까. 정답을 알겠는 마음과 모르겠는 마음을 함께 품으며 오늘도 잘 살아보자고, 사랑하는 마음을 다져 보자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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